한국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선구자였던 권기옥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권기옥은 우리나라 여성의 역사와 문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무엇보다 찬국의 첫 비행사로 꿈꾸었고 이루었고 그녀의 선구자적인 삶과 업적 유산은 후대에 귀감이 되며 도전을 줍니다.
한국최초의 여성비행사의 학창 시절과 3·1 운동
권기옥은 1901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몸담았습니다.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비행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윈난 육군강무학교 항공군사학부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했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되는 쾌거였습니다. 권기옥은 숭현소학교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 계통 학교인 숭현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박현숙의 영향을 받아 반일 비밀 결사인 송죽회 에 참가해 활동했다. 1917년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평양 곡예비행을 구경한 뒤로 비행사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숭의 여학교 졸업반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권기옥은 교사 박현숙과 정일성의 영향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3·1 운동을 준비하였고, 직접 거리에 나가 만세 시위를 하다 유치장에 구류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공채를 팔아 송금하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 9월 미국 국회의원 동양시찰단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대대적인 시위 행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던질 목적으로 독립단원들을 국내에 잠입시켰다. 권기옥은 숭현보통학교 석탄창고를 은신처로 제공하여 독립단원들이 이곳에서 폭탄을 제조, 그 해 8월 3일 거사에 사용하게 하였다.
한국최초의 여성비행사의 중국 망명과 비행학교 졸업
권기옥은 1920년 여성 동료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 t상해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1921년 중국어와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서양선교사가 경영하는 항주의 홍도여학교 중학과에 입학해 1923년 6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로 돌아와서 인성학교 교사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권기옥은 이 기간 동안 비행사가 되기 위하여 영어를 습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비행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학창 시절인 1917년 미국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여성이 비행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중국으로 건너가 비행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습니다. 1923년 12월 권기옥은 한국인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육군 항공대 창설과 비행사 양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에 권기옥은 임정 요인인 이시영의 추천서와 중국인 혁명가 방성도 (方聲濤), 운남성장 겸 독군 탕자오의 추천서를 받아 항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녀는 4개의 비행학교 중에서 윈난 육군강무학교 항공군사학부에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곳에서 그녀는 훈련비행 9시간 여만에 단독 비행도 허가될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녀는 1925년 2월 28일 졸업식에서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상정과 결혼하였습니다. 1925년 2월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비행탑승 적성검사에 합격해 비행사가 되니,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습니다.
한국최초의 여성비행사의 결혼과 비행사 활동
비행사가 되어 1925년 5월 상하이로 돌아왔지만, 임정의 재정 상황이 열악하여 항공대 창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권기옥은 계속적인 비행 연습을 위해 중국 비행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군벌 간의 경쟁으로 피난을 가거나 군이 해산되면서 한 군데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장가구·내몽골·베이징 등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1926년 초 장가구에서 이상정과 혼인하였다.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10월 내몽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7년 전 운남항공학교 교장 유패천의 소개로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 [張介石]의 국민혁명군 항공사령부 소속 비행사로 합류하였습니다. 그녀는 중국 공군의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소속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36년 하반기 권기옥과 이상정은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체포·수감되었고, 8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권기옥의 13년 비행 경력은 끝이 났습니다.
한국최초의 여성비행사의 임시정부 및 해방 뒤 활동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1937년 11월 이상정과 함께 난징을 떠나 1938년 3월 충칭 에 도착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국민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며, 라디오 방송 (일본어)을 듣고 내용을 기록하여 군에 제출하는 정보 수집 업무도 수행하였다. 1943년에는 김순애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고,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던 최용덕 등과 함께 중국 공군의 한국인 비행사를 활용하여 광복군 비행대 편성 및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해방 후 1949년에 귀국하였다. 남편 이상정은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으로 먼저 귀국하였는데, 11월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한국최초의 여성비행사 국가에 기여한 유산
권기옥은 귀국 후에도 독립운동과 공군 창설에 기여하였습니다. 1950∼1955년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정계에도 입문하였으나, 1956년 신익희의 사망과 함께 더 이상 정치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국방부 국방위원회 대표상임고문 겸 대표최고위원,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대한애국부인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출판인으로, 한국 연감을 발행하였습니다. 1988년 4월 19일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세상을 떠난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의 역사와 문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정부는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마치면서
권기옥은 우리나라 한국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로, 그녀의 선구자적인 삶과 업적 유산은 후대에 귀감이 되어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나라 독립과 여성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많은 면에서의 영성의 삶의 역할의 변화와 약진을 이루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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